대일산필 - (이병훈)

< 찰떡같이 듣고 해석하라 >

나라님께서 진솔함을 가장하여 은근히 상스런 말을 던지니 연단아래 앉은 갓 쓴 양반들이 박수를 쳤다. 그

박수의 정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다. 깡패도 날라리도 아닌 지존께서 그런 말을 써서 스스로 격(格)

을 무너뜨리니 그도 별수 없다는 보상심리와 또 한 가지는 정작 나도 평소에 쓰고 싶었으나 점잖은 체면 때문

에 쓰지 못했던 아쉬움에 대한 대리만족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.

아마도 상스런 말을 한 그 나라님은 “깨 놓고 말해서 흔히 쓰는 말이지 않는가”라는 항변을 할 것이고, 격 따

지기 전에 뜻을 확실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덧붙일 것이다. 다시 말하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

이 들어주리라는 기대의 발로라고 해석하면 지켜보는 사람이 덜 서글플까. 이처럼 말과 글은 해석을 잘해야

한다.

옛날에 어느 노인이 칠십을 넘어 바라던 아들을 보았다. 그런데 딸들은 이미 출가하여 가정을 이루고 있었단

다. 어느 날 노인은 사위에게 어린 아들을 잘 키워달라는 부탁과 함께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. 유서는 ‘七十生

男非吾子 子之畓泉上在 壻之畓泉下在’라는 내용으로 풀이하면 ‘칠십에 아들을 낳았으니 내 아들이 아닐 것이

다. 아들은 샘 위에 있는 논을 주고, 사위는 샘 아래에 있는 논을 준다’라는 것이 된다. 이 유서를 본 사위는

장인에게 고마워하며 어린 처남을 잘 길렀다고 한다. 알다시피 천수답은 물이 곧 생명이 아닌가. 그런데 아들

이 장성하자 아버지의 유언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. 아무리 자식을 부탁하는 입장이라지만 샘 아래의 논을

사위에게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. 그러던 중 아들은 그 유서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었다. 즉, 첫 문장 뒤에

물음표를 붙이면 ‘칠십에 아들을 낳은들 어찌 내 아들이 아니리요?’가 되고, 샘천(泉)자 뒤에 콤마를 찍으면

‘아들에 준 논의 샘은 위에 있고’라는 정반대의 해석이 된다.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인가.

때론 말은 글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져다준다. ‘태초에 신의 말이 있었다’에서 알 수 있듯 말은 참으로 신성

한 것이었다. 또한 ‘귀는 뜨겁고 눈은 차갑다’라는 말이 있다. 즉 말로 이루진 이야기에는 온갖 상상이 담겨

질 여지가 많아 뜨거운 반면 글은 정해진 의미로만 읽히기 때문에 차갑다는 것이다. 그래서 입으로 전해진 이

야기 속에는 우주가 있고 신화도 살아 숨쉰다고 할 수 있다. 어찌 보면 문학이란 콘텐츠가 무수한 세월이 지

난 지금에도 마르지 않고 이어져 오는 것은 바로 말의 포용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. 구전의 메커니즘이야말로

글의 생명을 면면히 유지시키는 열쇠일 것이다. - (수필가)